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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1/26 23:06:58
Name 김연아
Subject 품위있는 패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중 하나인 테니스에 패트릭 래프터란 선수가 있습니다. USO 2연패를 거머줜 적이 있는 상위랭킹에 상주하던 선수입니다. 사실 이 선수가 USO를 휩쓸 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젠장.. 너무 멋있었거든요. 흐흐. 남자의 불꽃같은 질투심이랄까. 배우급 외모에 키도 크고 테니스 선수이니 몸매는 기본이었지요. 장발로 기른 머리를 휘날리면서 코트를 뛰어다니는데 간지가 철철이었습니다. 거기에 테니스까지 잘 치니.. "쟨 뭐 길래 저리 잘 났어? 그래도 랭킹 1위급은 아니야?" 꼴같지 않은 질투를 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선수가 머리를 박박 민 뒤 생겨난 커다란 땜빵에 반하여 응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선수는 호주 출신이었는데, 2001년에 은퇴를 선언하고 마지막 호주 오픈에 임했습니다. 호주 오픈은 언제인가부터 호주 선수들이 부진하면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마지막을 장식하려는 래프터에게 온갖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4강에서 아가시와 만났는데, 2-1로 앞서던 도중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경기를 제대로 뛰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가시는 그 기회를 잡아 코트 구석구석 샷을 날렸구요. 정말 기권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경기를 끝까지 마무리 짓더군요. 자신의 마지막 호주 오픈을 기권으로 마무리짓기도 싫었을 것이고, 또 자신을 보러와준 고국의 팬들에게 보여주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었을 겁니다.

그리고 2001년 한 해를 마무리짓는 시드니에서 열린 마스터스 컵에서 그는 어깨 부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제대로 샷을 날리지 못할 정도로요. 그의 마지막 경기는 떠오르는 호주의 신예 레이튼 휴잇과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휴잇은 그와의 경기만 이기면 랭킹 1위로 등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그 부상 속에서도 휴잇과 경기를 가져주었습니다. 아직도 경기에서 패배한 후 박수를 쳐주며 랭킹 1위에 등극한 후배를 격려하던 래프터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국 팬들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후배가 멋지게 랭킹 1위에 등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부상 속에서도 마지막 경기를 치뤄냈을 겁니다.





토요일 날 경기를 직접 시청하지는 못했습니다. 친구가 얼굴 좀 보자고 해서요. 사실 나가기 직전까지 갈등을 많이 했는데, 워낙 친한 친구랑 단둘이 술잔 기울이는게 오랜만이라 약속을 잡았습니다. 경기는 다녀와서도 스포일러만 잘 차단하면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술이 알딸딸하게 오른 상태에서 집으로 들어와 경기 영상을 구했습니다. 1, 2 경기에서 독기품은 이제동의 날카로움을 느꼈고, 2경기에서 드랍 한 방으로 멋지게 역전하던 이영호의 플레이에 역시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3경기. 치열한 경기에 몰입해 가던 찰나 경기 영상이 나가더군요. 저는 컴퓨터 다운인가 하면서 화살표 신공으로 경기를 마구 넘겼습니다. 파일이 넘어가는 것도 모른채 말입니다. 재경기가 시작하였고, 이제동이 손쉽게 경기를 가져가더군요.

'흠.. 재경기한다고 이영호가 흔들릴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동이 정신력도 좋고 잘하긴 잘해~"하면서 4경기 영상을 켰는데,

에잉... 재경기와 같은 경기가 나오는 겁니다. 파일이 잘못된 것인가..하면서 3경기를 다시 틀고 잘 확인해보니 이제동 우세승 판정이었더군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우세하고 불리하고가 아니라 그 동안 그 정도 상황에서는 보통 재경기로 갔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제서야 4경기에서 이영호의 플레이가 이해가 갔습니다. 경기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허무하게 무너진다는 느낌을 이영호가 줬던 것이 납득이 갔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어느 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특히 스타처럼 멘탈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스포츠에서 말입니다.

그 이후 글들을 통해 당시의 어이없는 상황을 알 수가 있었고, 참 이영호도 화가 많이 났을 거다, 이제동도 그렇게 잘 했는데 이런 식으로 피해를 받냐.. 뭐 누구나 하는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궁금해서 경기 후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담담하게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던 이영호에게서 래프터의 모습이 오버랩되더군요.



Winner takes it all.
현대 프로스포츠에서 진리에 가깝게까지 받아들여지는 말이지만, 우리는 압니다. 아름다운 패자들이 늘 있어왔다는 것을요. 하지만, 아름다운 패자는 많을 지라도 품위있는 패자를 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전 사태와 논란의 판정 후 다시 마우스를 잡고 자신의 패배를 결정짓는 이영호의 모습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품이 넘쳤습니다. 이스포츠 최대 무대 중 하나인 MSL 결승전을 보이콧같은 걸로 얼룩지게 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책임감과 경기 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사태의 피해자인 이제동 선수의 우승을 담담하게 축하해주고 자신이 부족했다고 인터뷰하는 모습에서 근래에 여기저기서 넘치는 천박함으로 오염되던 오감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었습니다.



사실 일요일에 이 글을 쓰려고 했는데, 경기 지연 중에 혹시라도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접어두었습니다. 이영호의 인터뷰를 보고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나요.. 잠시나마 아주 미세하지마는 의심이라는 것을 가졌던 것에 대해 이영호 선수에게 굉장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사죄하고, 당신의 빛나는 인격과 품위에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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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zardMo진종
10/01/26 23:08
수정 아이콘
꼼딩 까는 글인줄 알고 들어왔다가 응원해주는 글이길래 선플 달고 갑니다 ^^;

다음시즌양대+다승+승률+광안리+정규리그 전부 먹길 기원합니다.

꼼딩 화이팅.
DavidVilla
10/01/26 23:09
수정 아이콘
평상시에도 그랬지만, 지금 인터뷰를 보면서 한 번 더 느낀건데, 이영호 선수는 정말 뭔가 다릅니다.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을 이 어린 선수에게 쓰게 될 줄이야..
롯데09우승
10/01/26 23:09
수정 아이콘
자신이 벌인 오물을 치우기 위해 Kespa와 엠겜이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때, 이영호선수는 선수로서 그리고 e스포츠의 팬들을 위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이 소년에게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뜻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靑龍의 力
10/01/26 23:14
수정 아이콘
경기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팬들을 위해 자리에 앉았다는 인터뷰를 보고 어리지만 책임감있는 선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10/01/26 23:14
수정 아이콘
끝까지 자리를 지킨 이영호 선수를 위해 추천 날립니다.
10/01/26 23:18
수정 아이콘
불미스러운 일로 영호선수의 경기력에 문제가 있진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오늘 경기로 그 걱정이 다 날아가버렸네요.
제동선수를 좀 더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얘기하면 멋진 라이벌로서 같이 지속될 수 있길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10/01/26 23:19
수정 아이콘
선수는 S급, 케스파와 엠겜은 F급..
아름다운달
10/01/26 23:25
수정 아이콘
이선수 요즘 유달리 이뻐요. 꼬맹이때도 이뻤지만. ^^
벤카슬러
10/01/26 23:31
수정 아이콘
선수는 S급, 케스파와 엠겜은 F급.. (2)
아니... 선수는 SSS급, 케스파와 엠겜은 폐급
그레이브
10/01/26 23:36
수정 아이콘
아름다운 패자라는 단어를 보니 또 한 사나이가 떠오르네요.

왜 그에게 하늘은 준우승만 주었는가....
김연아
10/01/26 23:39
수정 아이콘
그레이브님// 그 역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품위있는 패자입니다. 결승전 때문이 아니라, 디스 걸리기 직전 GG친 일 때문에요
롯데09우승
10/01/26 23:41
수정 아이콘
그레이브님// 음... 진짜 왜 그랬을까요?
돈키호테의 꿈
10/01/27 11:11
수정 아이콘
롯데09우승님// 박정석 선수와의 (저플전 악명높은) 패러독스에서의 경기였습니다.
맵과 상대종족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 홍진호 선수가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또 달리보면
마지막 한타 싸움으로 역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희망 정도는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경기에 몇 번 렉이 걸리며 네트워크가 불안정한 상태였고, 그대로 다운이 되면 (심판-우세승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재경기를 노릴 수 있는 상황. (박정석 선수로서는 불안하고, 홍진호 선수로서는 기대될 수 있는)
그 순간에 홍진호 선수는 마지막 희망을 접고 GG를 칩니다. 다운 --> 재경기로 인한 논란을 불식시키는 순간이었고
(제 기억이 맞다면) 마이큐브 온게임넷 8강에서 홍진호 선수의 탈락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홍선수를 이기고
올라간 정석 선수는 4강에서 강민 선수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명승부를 연출했고, 탈락한 홍선수는 듀얼토너먼트
에서 베르트랑, 조정현에게 연속으로 지며 한빛소프트배 이후 최초로 PC방행을 하게 되고 이어서 MBC 게임의 TG
삼보 결승에서 최연성 선수에게 3연패하며 자신의 첫 슬럼프를 알렸죠...)

한 편으로 좀 더 독하지 못한 진호 선수가 원망스럽기도 하고(팬으로서) 다른 한 편으로 그의 팬이란게 자랑스러웠던
순간이기도 했었습니다. 이재균 감독님도(당시 정석 선수가 한빛 소속) - 아마 pgr에서 였던 것 같은데 - 이 일을 두고
홍진호 선수를 매우 칭찬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찌몬다면 낭만 - 혹은 아마추어리즘? - 이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아에리
10/01/27 11:50
수정 아이콘
돈키호테의 꿈님//저도 기억납니다 그 경기..제가 스타를 보는 한 영원히 못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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