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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9/09 10:02:05 |
Name |
윤여광 |
Subject |
Fallen Road. Part 1 -1장 14화- [-조우#5-] |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4화.
[-조우#5-]
#
다시 돌아온 여관은 시간이 늦어서인지 굉장히 조용했고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던 주인장은 나와 켈모리안이 들어오자 성급히 어서오라며 인사를 하려다 발이 꼬여 몇 번 헛걸음을 떼야했다. 애초에 나와 아크가 머물던 방은 2인실이었고 때문에 켈모리안이 같은 여관에서 머물기 위해선 방을 하나 더 잡아야 했다. 문제는 나와 켈모리안 둘 다 돈이 없었다는 점이고 우리가 이미 머물고 있던 방에 켈모리안을 들이자니 안그래도 레인저들의 부탁으로 무료로 방을 내준 마당에 한 명이 더 들어오겠다니 주인장 입장에선 꽤나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물 한잔 부탁한다는 부탁에 주방에 가서 알아서 따라 마시라는 매몰찬 대답을 듣고 난 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기로 했다.
“이봐. 요르.”
“응? 왜?”
“이제 어떻게 할거야. 갖고 있던건 다 잃어버렸고 여기서 수도로 가는건 좀 힘들지 않겠어?”
“일단은 이 곳 레인저들에게 도움을 받아봐야지. 내일은 아마 그 왕녀인지 뭔지 하는 높으신 분 오는 길 때문에 힘들 것 같고. 아까 대장이라는 사람이랑 얘기한 바로는 이틀간 여기 숙박비는 대주겠다고 했으니까. 그 후에 얘기해봐야지.”
“이틀? 그거밖에?”
“뭐. 우리가 이렇게 된게 그 사람들 잘못은 아니잖아. 직무태만의 문제까지 끌고 내려가면 이틀은 고작이 맞지만 이 쪽도 나름대로 사건이 있었대잖아.”
“젠장.”
켈모리안은 대접이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자꾸 뭔가 혼자 계속 궁시렁거렸다. 그 중엔 나와 아크를 탓하는 듯한 말도 흘러나와 가끔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야했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방으로 올라가는 내내 그 입이 멈추질 않아 결국 참지 못한 내가 시원하게 엉덩이를 걷어차고서야 아프다며 징징대다가 이번엔 주먹을 쥐어보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다녀왔어.”
“왔냐.”
침대에 누워있던 아크가 일어나지도 않은 채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기색을 풍기며 대답했다. 뒤따라 들어온 켈모리안을 흘끗 쳐다보더니 귀찮은 게 하나 더 늘었다는 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피곤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사람이 마치 나라라도 하나 세운 것 마냥 힘들다는 기색이다.
“그래. 그 작자들이 뭐래디.”
“작자…….는 아니고. 뭐 어쨌든.”
“별 말 없었어. 이틀 정도 여기 머무르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대로 배려해 주겠다더라.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내일 좋은 구경거리가 생길 테니까. 그거나 구경하면서 쉬지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좋은 구경거리?”
나와 켈모리안은 레인저들에게 전해들은 대강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쇼넬의 왕녀가 내일 이 곳 라임턴에 당도하게 될 것이고 그 때문에 당장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는 상황까지. 어차피 우리가 손해 보게 되는 것은 약간의 시간일 뿐 그 외의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사건의 현장을 찾았을 때 분실물을 모두 찾지 못한다면 그 때부턴 문제가 된다. 특히 금전적인 측면에서.
“그래. 그럼 내일은 꼼짝없이 이 여관에서 퍼질러 있어야 겠구만.”
“그래야 할 거 같아.”
아크는 내일 하루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답답했던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켈모리안 역시 더 떠들 기운이 없었는지 냉큼 남은 침대 하나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아버렸다. 이 자식이. 난 어디서 자라고.
“야야. 임마. 일어나. 이게 어딜!!”
“아. 몰라.”
“어쭈!”
나와 켈모리안은 침대 하나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 녀석이 이불을 온 몸에 둘둘 말고 나는 이불이 말린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굴리며 유리한 고지 선점을 위해 한 치의 양보 없이 으르렁대며 방 안을 쓸데없이 덥게 만들고 있었다.
“야! 이 멍청이들아!”
보다 못한 아크가 우리 둘만의 외로운 싸움에 참전했고 그가 합류함으로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우리는 아직 통증이 사라지지 않은 상처는 까맣게 잊고 어느 새 입가에 웃음이 사라진 채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동화에서나 나오는 사내 녀석들의 순진한 웃음과 장난기 가득한 손장난 따윈 없었다. 단지 우리 중 둘은 하나 남은 편한 잠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두 명의 한심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한 시끄러운 싸움을 한시라도 빨리 잠재우고 다시 곤한 잠을 청하기 위해서 주인장이 시끄럽다며 악을 쓰며 방문을 열기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노기가 가득한 눈으로 우리 셋을 쳐다보던 주인장은 따라 내려오라며 바닥에서라도 잘 수 있게 여분의 이불을 내주겠다고 했다. 반강제로 아크의 손에 떠밀려 침대에서 떨어진 나는 한 대 툭 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으로 숨을 고르는 둘을 노려보다가 아쉽게도 등을 돌려야했다.
#
잠이 오질 않는다. 아까의 치열한 전투 덕분에 땀이 흘러 불쾌했던 나는 주인장이 집어던지다시피 하는 이불을 홀의 테이블 위에 곱게 올려놓은 뒤 땀 좀 식히고 갖고 올라가겠다며 그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는 이제는 맘에 안 든다는 의사표시에 더하여 의심스럽다는 한층 더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날 노려보던 그 노인네는 웃으면서 방에 들어가 쉬어도 된다는 나의 권유는 깡그리 무시한 채 카운터에 눌러앉아 위태롭게 타고 있는 작은 촛불에 의지하여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더 이상 그와는 어떻게 더 잘 지내볼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여관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는 쓸데없이 뜨거워진 내 몸을 식히기에 적당했다. 하늘에 드문드문 떠 있는 구름이 환한 달빛을 부분적으로 가리면서 꽤 멋진 밤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의 흐림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이 가렸던 하늘을 보여주기 시작하자 나는 환하게 빛나는 달과 함께 그 옆에서 나도 봐달라는듯이 호소하는 수많은 별들에 한 번 더 감탄할 수 있었다.
오즈의 하늘도 이와 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웠을까. 여태 그 작은 마을에서 쭉 살아오면서 한 번도 밤하늘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내 고향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것에 대해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크의 함께 조용히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갖는 대련이 끝나도 우리는 턱 밑 까지 차오른 숨을 거르며 마당에 누워 하늘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뭐 이런 사내들 사이에 흔히 말하는 낭만과 같은 기억 따윈 단 한 번도 없다.
세상구경이나 한 번 다녀오자. 정확히는 내가 무심코 내뱉은 이 한 마디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나온 계기가 됐다. 그렇다고 뭐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거리를 지나온 것도 아니지만 여태 그 작은 마을의 경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걷기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와중에서도 그래도 나서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었다. 반갑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결국 훗날에 이런 일도 있었지하며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는 정도의 해프닝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과 같이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사건은 사양하고 싶다.
“안자고 뭘 하고 있소?”
습관적으로 내뱉는 한숨 소리만이 조용한 밤공기에 어울리던 와중에 내게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잠든 사람들마저 깨울 심산인 마냥 큰 파동으로 그 얌전한 리듬을 뒤흔들었다.
“란?”
목소리로 기억한다기보다는 그 성량으로 누군가를 기억하게 되는 일은 드문 일이다. 고개를 돌려 쳐다본 어두운 거리엔 또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란이 서 있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다.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차린 후부터 나는 그를 따라 웃고 있다.
“자넬 찾아온 것은 아니네. 순찰 중이었거든.”
옆으로 다가와 주저앉는 란을 보니 아까와는 다르게 가벼운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 아직 근무가 끝나신 게 아니셨군요.”
“원래는 내 순번이 아니었지. 뭐. 갑작스럽게 도착하신 귀하신 분 덕에 내일 아침 일찍 동원될 대원이 원래 순번이었어. 지금 자둬야하니 시내에 남게 될 내가 나온 거지. 지금도 하우스 내에선 잠도 못자고 한창 준비하고 있는 몇몇 친구들이 있을 거야. 그에 비하면야 난 편한 거지. 이렇게 한가롭게 산책이나 하면 되니 말이야.”
낮춘다고 낮춘 목소리 같은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히 낮은 음만 연주하는 라임턴의 악보에 큰 파장을 기록해나가고 있었다.
“아까는 참 미안했네. 그래도 손님이었는데 그렇게 정신없이 대접해서 내보내다니 말이야. 가는 길에 인사 한 마디도 못했군. 무례를 용서하게나.”
“아…….아닙니다! 무례라니요. 저는 잘 모르지만 분명 급한 일이 생기신 것은 맞지 않습니까. 거기다 저흴 구해주시기 까지 하셨는데 가는 길 까지 돌봐달라고 바라는 게 오히려 실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야 나야 고맙네만.”
“저어. 란.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말하게.”
“오늘 있었던 큰 일이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아무래도 저희가 당한 것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어서요.”
“흐음…….”
란은 망설이는 얼굴로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시켰다. 말해야 하는 동기가 필요하다는 듯 한 얼굴이다. 내가 또 좀 친절하니 그거야 간단한 일이지.
“아크의 말로는 오크들은 집단으로 무리지어 행동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오크와 만난 곳은 북서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지대였고요. 란과 동료 분들께서 매일 일정한 주기를 두고 순찰하시는 모험가들과 상인들에게 있어 안전하다고 안내서에까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에 오크의 무리가 서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
“그리고 우리가 만난 오크는 단 한 마리였습니다. 단독으로 무리에서 이탈해서 북서로까지 혼자 걸어왔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거 참. 난감하구만. 알겠소. 뭐 자네들도 아주 연관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니 알아도 상관없겠지.”
란은 나를 못본척 그냥 지나가야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웃기는 왜 웃는 거야.
“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진이요?”
“그래. 진. 정확한 명칭은 아니네만 딱히 부를만한 이름이 그것뿐이군. 쇼넬인들은 그렇게 부른다는군.”
“그게 뭐죠?”
“일종의 소환술이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소환과는 조금 달라. 소환이라는 것은 대상을 시전자가 있는 위치로 옮겨온다는 개념이라면 이 진이라는 것은 특정한 위치에 마법 진을 그려두고 그 진을 대상이 있는 장소와 연결하는 것이네. 한 마디로 소환은 대상물을 내가 있는 장소로 옮겨오는 것이라면 진은 대상이 있는 곳과 마법진이 그려진 곳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지.”
“그렇군요. 아 그럼 그 진이라는 게 혹시…….”
“코르사크의 만행일세.”
소문으로 들은 적은 있다. 코르사크는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원하고 있으며 꿈쩍도 하지 않는 이 강대한 세 나라를 향해 꽤 끔찍한 도발을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다고. 세상 구경 해보겠다고 나선 첫 여행길에 그런 높으신 분들의 복잡 미묘한 이해관계 타결을 위한 지저분한 수단에 농락당하다니. 이거 왠지 별 거 없었던 우리의 모험이 거창해지는 느낌이다.
“그 문이라는 개념은 한 번 열리게 되면 영구적으로 유지가 되는 건가요?”
“시전자가 원하는 시점에서 닫을 수도 혹은 영구적으로 열여둘수도 있네. 단 양 쪽의 마법진이 온전하다면 말이야. 어느 한 쪽이라도 조금이나마 흐트러지면 그 진은 망가지는 것일세.”
“그럼 그 오크는…….”
“그렇네. 진을 통해 넘어온 녀석이지. 어제 아침 총 4마리가 이 곳 라임턴의 외곽 지역으로 넘어왔다네. 소수였으니 망정이니 무리 전체가 넘어왔다면 아마 자네들도 그렇고 우리들도 그렇고 지금 이렇게 숨 쉬고 있기 힘들었을 거야.”
“.....”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럽지만 란의 가정을 듣고 나니 자칫 정말 죽을 수도 있었구나 하는 상상에 손이 떨렸다.
“즉시 출동하여 3마리를 처리하긴 했지만 1마리를 놓쳐버리고 말았지. 자네들이 마주친 그 녀석이 바로 도망친 놈일세. 우리가 그 녀석을 추격하던 와중에 자네들을 발견했던 것이고.”
운이 나빠도 이렇게 나쁠 수가 있을까.
“사실 그 자리에 자네 같은 모험가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네. 북서로는 반나절 정도만 시간을 투자하면 통과가 가능한 경로이기도 하고 멀쩡히 있는 대로를 두고 그런 숲지대에 들어갔으리라고야 생각하기 힘들었지. 뭐 다행히 늦지 않게 우리가 자네들을 발견하긴 했네만.”
“가…….감사합니다…….”
“아니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직무 태만이 낳은 결과이니 오히려 우리가 정중히 사과하고 보상 절차에 들어가야겠지. 실제로 그러려고 했네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꼬여버렸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대장께서 이틀간 라임턴에 체류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셨으니 그 정도 조취로 만족합니다. 충분히 감사한 배려이십니다.”
“자네 보기보다 처세가 좋구먼. 허허허.”
아니. 난 정말 고마워서 고맙다고 한 말인데. 처세라니. 이 양반이…….
“그보다 이거 큰일이네. 로즈 왕녀께서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으시다니. 골치아프구만.”
“네? 왜요?”
“음. 자네는 잘 모르는구만. 아까 말했던 진에 관해서 쇼넬은 아주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이네. 그에 반해서 우리 엔트릴과 이웃 놀헨의 경우는 또 다시 대륙에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지. 헌데 지금과 같은 사건이 쇼넬의 왕녀 귀에 들어갔으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연합 회의에 다시 한 번 강경하게 코르사크를 정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울 그들에게 이 사건은 너무나 좋은 명분 아니겠는가.”
“아아…….”
“헬릭이라는 자의 행동도 그리 생각하면 납득이 되겠지. 당연히 거절당할 부탁임을 알면서도 그리 뻔뻔스럽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을 처음부터 확실히 하고 가겠다는 말일세. 먹이를 발견했으니 절대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 그러니 순순히 양보해라. 뭐 이정도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라임턴에서 코르사크의 진에 관한 명확한 물증을 확보하게 된다면 란의 말대로 연합 회의에서 그들의 입지는 엔트릴 혹은 놀헨에서도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갈 것이다. 이렇다 할 명분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연합의 한 축이 제안한대로 나머지 두 나라는 함께 움직여야 할 것이고 이는 코르사크에 대한 응징 혹은 그것을 넘어서 짓밟는 행위까지 가능할 것이다.
“세 나라가 힘을 합치게 된다면 북방의 작은 나라 따위 정복하는 게 어렵겠는가. 문제는 그 다음이지. 영토 전쟁으로 엔트릴에 원래의 땅을 뺏기게 된 쇼넬이 가장 먼저 기득권을 내세우겠지. 그도 그럴 것이 정복의 계기가 된 진에 관한 수사의 첫 시작과 끝까지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쇼넬이었고 또한 정복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 그들이 동원하게 될 군사력은 엔트릴과 놀헨의 힘을 합해야만 그제야 비슷한 수준에 올라설 만큼 강대하기 때문이지.”
“군사…….에 관해서라면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만…….”
“그러니까. 기여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될 것일세. 말이야 연합 국가이지만 어쨌거나 세 나라는 각각 자국의 병력을 갖추고 있네. 따라서 세 나라가 싸우게 될 전장 역시 좁은 북방의 땅이라도 각자 다르겠지. 그렇게 전쟁이 진행이 될 경우 어느 쪽이 가장 많이 승전보를 울리게 되겠는가.”
“따로 움직이게 된다면 아무래도 가장 강한 쇼넬 쪽이…….”
“그렇네. 거기다 코르사크의 강력한 마법력에 맞설만한 수단 역시 쇼넬에 비하면 엔트릴과 놀헨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라네. 치고 나가는 속도가 쇼넬에 비해 더딜 수밖에 없겠지.”
“아. 그렇다면 그 진이라는 마법 때문에 피해를 가장 많이 보는 건 우리와 놀헨이겠군요.”
“전쟁이 시작된다면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야 그렇지 않다네.”
간단한 계산 후에 자신 있게 내뱉은 한 마디가 완벽한 동의를 얻지 못하자 나는 다시 머리를 굴리며 셈을 시작했다. 란의 이야기만을 종합하자면 내 말이 맞을 텐데. 더욱이 그의 대답은 내 대답을 반은 긍정하면서 반은 부정하고 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가끔 말을 헷갈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지금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쇼넬일세.”
“예? 왜요? 가장 강대한…….”
“그러니까 쇼넬을 건드리는 것일세.”
“끄응. 어째서…….”
“코르사크의 입장에선 연합국이라는 결과만 남긴 채 휴전으로 마무리 된 영토 전쟁이 아쉬웠을 테지. 내륙 지방으로 영토를 넓히고 싶었던 욕심은 채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자물쇠만 단단하게 채워버렸으니 말이야. 그래서 그 자물쇠를 깨려는 것일세. 자기들의 손이 아닌 쇼넬의 힘을 빌려서 말이야.”
“아하!”
“이제야 좀 알겠는가. 각각의 힘을 재자면 가장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 쇼넬을 계속 자극해야만 잠자코 있는 엔트릴과 놀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일세. 마침 쇼넬 역시 원래의 영토를 엔트릴에 빼앗긴 입장이니 서로 말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봐야겠지.”
“그렇지만 정말 세 나라가 동시에 자기네 나라로 침략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낭패가 아닌가요? 1대3을 버텨낼 만큼 코르사크의 마법력이 강대한건가요?”
“이건 내 짐작이네만. 쇼넬이 단독으로 연합을 깨고 선전포고를 하기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싶네.”
단순히 레인저들이 쉬쉬하던 사건에 대해서만 알고 싶었던 나는 어디서부터 깊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세 나라의 이해관계에 대한 란의 해석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래도 몇 년 전 학교에서 듣던 지루한 역사 수업과 같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사건에 잠깐이나마 등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쇼넬의 단독 선전포고. 그리고 엔트릴과 놀헨과의 연합 붕괴. 휴전을 깨고 다시 시작되는 영토 전쟁. 결국 끊어지는 놀헨과 엔트릴의 동맹 관계. 이렇게 중앙의 세 국가가 서로 그 관계를 적대하게 되고 한 방향의 전쟁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노리게 되는 복잡한 상황이 되면 아무리 대륙 내 가장 작은 나라라고 할지라도 치고 나갈 방도가 생긴다는 계산이겠지. 그들은 애초에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란의 짐작은 거기까지였다. 실제로 그들이 도발이 란의 추측대로 흘러가기 위한 출발점이라면 나는 차라리 세 나라가 단숨에 코르사크라는 나라의 이름을 대륙의 역사에서 지워 내주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 내가 불려나가게 될지라도. 아. 그건 아닌가?
“어쨌든 그렇다는 말일세. 이만 일어나봐야겠군. 어서 이 지루한 산책을 마치고 나도 돌아가 자야하니 말이야.”
“아아. 괜히 저 때문에 시간 뺐기신것은…….”
“아하하.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봐야지.”
긍정할거면 긍정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애매모호하다 못해 그 산만한 덩치가 아까운 사람아!
“자네도 밤공기가 차가운데 어서 자지 그러나. 몸도 피곤할 텐데. 푹 쉬고 내일 왕녀 일행께서 지나가시는 광경이나 편하게 구경하게. 그만한 구경거리는 다시 보기 힘들 테니 말이야.”
“아. 네. 고맙습니다. 란.”
다시 산책(?)에 나서며 힘차게 손을 흔드는 란을 보며 나도 바닥에 혼자 앉아 궁상떠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란의 역사 수업은 종료를 알리는 그 힘찬 발걸음과 동시에 나에게 잊고 있었던 피로와 잠의 유혹을 다시 기억나게 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순응하는 것으로 두 남자의 한 밤중의 뜬금없는 대화는 끝이 났다. 우리가 휘말린 사건이 생각해보면 얼마나 대단한 일의 일부분인지에 대해 알고 나면 아크와 켈모리안은 나에게 뭐라고 대답할까. 사기꾼. 시끄러워. 헛소리. 잠이나 자. 란의 수업과는 다르게 내가 맡을 그 시간은 참 지루하면서 동시에 격정적일 것이다. 눈에 가시 같은 연합국을 깨기 위해 그 중 가장 강대한 국가를 도발하는 급의 모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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