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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8/20 15:45:32 |
Name |
윤여광 |
Subject |
Fallen Road. Part 1 -1장 20화- [-奇遇-] |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20화.
[-奇遇-]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광장에서 한참을 걸어 시의 북쪽으로 향한 우리는 일개 도시에 세워진 손님맞이 숙박시설 주제에 지나치게 거만하고 웅장한 자태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정확히 우리라는 집단에서 프렌들은 빼야지. 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쇼넬의 병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서 있었고 프렌이 건넨 시장이 작성한 문서를 보이자 곧바로 창을 거두며 길을 내줬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를 안내하는 안내인이 따라붙었고 그는 이것저것 긴 말 없이 바로 짧은 하루를 머물게 될 방으로 안내했다. 여관까지 우릴 만나러 왔던 파벨이라는 자와 만남을 청한 프렌은 잠시 기다려 달라는 안내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홀에 남았다. 아마도 우리 일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궁금했지만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조용히 안내인을 따라가기로 했다. 실내는 화려하기보단 깔끔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머물러 사는 곳이 아닌 기약 없이 손님만을 기다리는 곳이다 보니 화려한 장식들이나 치장보다는 깨끗함을 유지하는데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중앙 홀의 한 가운데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큰 계단이 있었고 계단의 양 옆으로 홀의 뒤로 넘어가는 문이 있었다. 좌우 벽으로는 홀 뒤편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는 방들로 들어가는 문들이 즐비했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꾸려온 짐을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라임턴의 시장이 파견한 하급 관리들도 있는 모양이었는지 일하는 몇몇 이들은 어색한 도움의 손길을 나누며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 마다 어설픈 미소를 보이곤 했다. 크리스와 란은 이곳을 몇 번이고 다녀간 적이 있어 익숙한 장소였겠지만 나와 아크는 이런 궁은 커녕 시 단위의 행정 기관 건물에 조차 가본 적이 없었기에 연신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감탄사를 내뱉기 바빴다. 다만 나는 궁의 규모와 홀 내부의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면 아크는 이 곳 저 곳에서 보이는 쇼넬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잘 손질된 은빛의 무기들과 분주한 가운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면만을 응시하며 서 있는 경비병들을 보며 그 근엄한 기세에 놀라고 있었다.
“처음 봐. 왕가의 사람들을 따르는 병사들이라니. 틀림없이 엄청난 사람들일거야.”
“형. 형. 저것 봐. 후아!”
사실 가장 큰 소란을 떨 것 같았던 켈모리안이 조용하다는 것이 놀랄 포인트라면 포인트다. 그는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주체할 줄 모르는 나와 아크와는 달리 점잖은 자세로 묵묵히 안내인의 뒤를 따르는 크리스와 란과 같이 이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매우 담담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어쩌다 쳐다 본 그의 표정이 바뀐 것은 조용히 해달라는 안내인의 청 때문에 다른 이들이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된 후.
“어이. 이봐. 거 이런 곳 처음 와봐? 뭐가 그렇게 시끄러워.”
이런 곳? 어디다 할 말이 없어서 이웃 나라 공주님이 머무는 잠시 쉬어가시는 곳을 그리 간단하게 이런 곳이라고 하는 거야. 네 녀석 혹시 말이야.
“하하. 죄송합니다. 저 분들은 이 베니자크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자유로운 여행가들이시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실 테지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시군요.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으니 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이 이렇게 오가자 나와 아크는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만 그만 둔 채 여전히 소리 없는 감탄사를 온 몸으로 표출해내느라 더 바빠졌다. 이 쯤 되니 안내인은 나와 아크를 보며 피식 웃기만 하고는 더 이상 주의를 주지는 않았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기한 걸 어떻게 하나.
“거 참. 니들 수도에 도착해서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수도는 어떤데?”
“여긴 그냥 평범한 집 수준이야. 그냥 조금 큰 여관 수준밖에 안된다고.”
이리 깔끔하고 멋진 곳을 겨우 조금 큰 여관 따위에 비유한 것에 나와 아크는 화들짝 놀라 크리스와 란의 안색을 급히 살폈다. 다행히 둘은 별다른 기색이 변함없이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고 켈모리안 역시 맘에 안 드는 거만한 얼굴 그대로였다.
“넌 뭐하는데 수도에 갔다 온 건데?”
“.니들이 날 뭐 때문에 사기꾼이라고 불렀었냐. 그 망할 지도. 새로 발행되는 지도를 사려면 수도로 가는 게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니까. 그것도 그렇고 지방에선 얻기 힘든 비싼 정보들을 사러 가는 거지. 중간 다리 삼아서 팔아넘겨도 경우에 따라선 큰돈이 되니까.”
사기꾼이니 뭐니 해도 결국 그는 우리보단 수도 그리고 길드에 대해선 월등히 경험이 더 많았었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여부는 없지만 우리보다야 더 많은 유용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이제야 그가 새삼 대단하게 보였고 꽤 한다는 눈빛을 보내자 더욱 기고만장한 녀석은 앞도 보지 않고 걷다가 발이 엉켜 요란한 소릴 내며 바닥을 굴러야했다. 안내인은 이번에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뒤를 돌아봤고 크리스와 란 역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다만 아크와 나는 니 놈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하며 편안한 심정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그를 내려다봤다.
“어째 혼자 너무 조용히 있다 싶었다.”
“시…….시끄러워!”
“조용히 해라. 저 분이 또 노려보신다.”
분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노여움에 가득한 안내인의 시선에 켈모리안은 고개를 떨어뜨려야했다. 이제야 서로에게 맞는 자리로 돌아가 역할 수행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뒤로 나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니 그 곳은 일자형 복도로 길게 이어진 통로였다. 우리는 가장 끝에 위치한 방으로 안내 받았고 크리스와 란이 같은 방 그리고 나와 아크 켈모리안이 한 방을 배정 받았다. 곧 홀에서 라임턴시에서 준비한 간단한 파티가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안내인은 그대로 돌아갔다. 멋대로 궁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혹시나 용무가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옆 방에 있는 크리스나 란을 동반하여 움직여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아무래도 시에서 신분을 보장하는 레인저들과는 달리 어디에 사는지 조차 알 바 없는 모험가인 우리를 신경 쓰는 듯 했다. 나 역시 괜한 오해는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하겠다는 간단한 말로 그를 안심 시키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이전에 머문 여관과는 비교 할 바가 아니었다. 궁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화려한 장식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에 두 사람이 누워도 넉넉한 침대가 있었다. 여관에서의 그것보다는 컸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 사람이 함께 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자. 니 둘이서 알아서 해라.”
아크는 그나마 나이가 제일 많다는 것을 내세우며 여유롭게 걸어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나와 켈모리안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세 명이서 공평하게 제비나 뽑자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우리가 뭐라고 말을 하든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해 보이는 이불을 더 단단히 둘러 감고선 귀를 막아버렸다. 결국 나와 켈모리안은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을 꺼내 앞뒤로 패를 나눠 갖고 거기에 운을 걸기로 했다.
“자자. 물고 늘어지기 없기다.”
“잔 말 말고 던져. 내가 앞. 네가 뒤. 진 사람은 뒷말 없이 바닥에서 잔다. 됐지?”
“바닥에서 자든가 아니면 다른 방을 내달라고 말을 하든가.”
“그래. 그거야 뭐 지는 사람이 알아서 하는 거지.”
“던진다?”
“던져서 잡지 말고 그냥 바닥에 떨어뜨려. 혼자 멈출 때 까지 건들지 말고.”
“아오. 알았다. 알았어. 거 참 말 많네.”
“아! 얼른 던져!”
순순히 바닥에서 잘 것이냐 아니면 우릴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안내인을 다시 찾아가 방 하나를 더 요구할 것이냐. 누가 어느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냐는 순전히 켈모리안의 손에 쥐어진 저 동전에 달려있다. 그 동전에 켈모리안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별 수 있나. 동전 주인이 던지겠다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겨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팽글팽글 도는 그 금속조각을 쳐다보던 나와 켈모리안은 곧 서로 다른 얼굴로 그 동전에서 시선을 뗐다. 한 사람은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웠고 다른 하나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무심히 바닥에 떨어져있는 동전을 주워들었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은 확실했고 때리고 싶을 만큼의 편안한 미소는 패자로 하여금 더욱 더 치를 떨게 만들 것이다. 동전을 쥔 주먹은 그것을 구겨버릴 것 같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방금 전 돌아간 안내인의 걸음걸이가 느리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옆방의 레인저들은 좋겠구나. 침대가 어떻게 있든 간에 편하게 있겠구나. 그 편안한 휴식을 방해해야 하니 그 민망함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가 없겠군.
#.
“그건 좀 곤란하셨겠군요.”
“하하. 네. 결국엔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가는 길을 함께 하기로 하긴 했지만. 뭐 별 탈 없이 수도에 도착하게 됐으니 쓸데없이 자극하거나 그러진 말아야죠. 소란스럽게 해서 좋아질 일 하나도 없으니까요.”
“후후. 그래요.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지요.”
양과 음 단 두 가지 확률의 내기에서 켈모리안에 밀려버린 후 나는 안내인을 다시 찾기 위해 옆방의 문을 노크했다. 마침 레인저 하우스에 중요한 소지품을 두고 왔다는 크리스가 나설 채비를 하는 중이어서 나는 굳이 아쉽게 부탁하는 말없이 그대로 그와 함께 홀로 나왔다. 여전히 홀은 분주했으며 아까보다 돌아다니는 인원들이 더 늘어난 듯 했다. 소란스럽기는 유난히 궁으로 들어오는 정문 왼쪽에서 뭔가 그럴듯한 직책 하나 꿰차고 있을 듯 한 파이커즈의 사내가 그랬다. 그는 자신의 부하로 보이는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느라 잠시라도 그 입을 다무는 때가 없었고 목소리 역시 여관에서 마주쳤던 쥰을 생각나게 할 만큼 쩌렁쩌렁 홀을 울렸다. 그러면서 본인도 슬금슬금 움직이며 간단한 소일거리는 본인이 직접 처리하는데 아직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갑주 덕에 그 움직임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많이 늦으시네요. 그렇게 바쁘신가. 방으로 그냥 돌아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조급해하지 마시고 편히 앉아서 기다리세요. 어차피 그는 이 방에 꼭 한 번은 오게 되어있으니까.”
“흐음. 그거야 그러시겠지만 그래도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그 분이…….”
“그가 오면 다른 어떤 일보다 최우선하여 불편하신 점을 시정하도록 지시해드리지요.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시나 이곳에서 기다리시나 시간이 지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오히려 이곳에 그냥 계시는 게 더 빠른 해결 방책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아…….저…….”
“네?”
“배…….배려는 정말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감사합니다만…….”
“어머.”
“저…….높으신 분께서 저 같은 평민을 이리 가까이 두셔도 되는 것인지…….”
나와 크리스는 홀을 계속해서 둘러보던 와중에 울 것 같은 얼굴로 파이커즈의 갑주에게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파이커즈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가 지시내린 사항을 자신의 큰 목소리를 통해 홀 전체에 내보냈다. 단지 지시를 내리는 것뿐이었는데 표정이 저렇게 울상인 것을 보면 겨우 잠자리 좀 불편한 것 가지고 붙잡아 세우기가 좀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까짓것 내가 언제부터 나리들 마냥 편하게 침대에서 잤다고. 바닥에서 자도 아무 상관없다. 차가운 흙바닥에 비하면 야 천국인 셈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안내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왜? 그가 미워서? 내가 저 안내인에게 억하심정 생길 일이 뭐가 있담. 이건 순전히 켈모리안 탓이다. 내기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그 녀석이 편안히 침대에 누워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져 자는 나를 보며 이죽거리는 꼴은 못 본다.
“엔트릴의 국민이시지요?”
“네?”
“엔트릴의 국민이신가하고 여쭈었습니다.”
“네? 아. 네. 맞긴 맞죠…….”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품더니 마저 이야기를 이어간다.
“분명 저는 평민이 아닌 상위 계층의 사람입니다.”
“네. 그러하시지요.”
곱게 내려앉은 드레스하며 손에 작은 주름 하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기품이 내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 다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체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녀가 괜지 얄미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당신의 이웃 국가 쇼넬의 한 일원으로서 보장 받는 신분일 뿐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 지위가 아닌 보호대상으로서의 명분이 될 뿐이랍니다.”
“네?”
이 아가씨가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만 하네.
“저를 상위 계층의 일원으로서 존중하고 경우에 따라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쇼넬의 국민들에 제한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 하여 제가 이웃 나라의 소중한 국민들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손님과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적당하지 않을까요. 전 어디까지나 당신의 조국을 방문한 손님일 뿐입니다. 손님으로서 주인의 배려를 기대할 순 있지만 무조건적인 봉사는 요구해서는 안 되겠지요.”
“아아. 네.”
“그러니. 그냥 편히 그 자리에 앉아 계셨으면 합니다. 몇 번 겪어본 바로는 수도로 출발하기 바로 전 날이 가장 지루하답니다.”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그대로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아무래도…….”
“그럼 차라리 제가 당신에게 강요를 하는 게 편하시겠어요?”
“에에. 그건 그거대로 난감할 것 같습니다만.”
“하하. 재밌는 분이시군요. 연현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부탁드릴게요. 말동무가 되어주세요. 몇 번이고 엔트릴에 와봤지만 언제나 이 시간이 제일 지루하더군요.”
“에? 지루하신가요? 저 밖의 사람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뛰어다니던데.”
또 웃는다. 이래보니 그래도 웃는 모습은 꽤 예쁘다.
“하하. 방금 말씀드렸지요. 제가 가진 신분이 보장하는 명령의 효력은 쇼넬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유효하다고.”
“네. 그러셨죠.”
“저들은 쇼넬의 일원입니다. 밟고 서 있는 땅이 비록 엔트릴의 어느 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변하진 않으니까요.”
“아하!”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자.
안내인의 어깨를 붙잡고 나를 향해 돌려세우니 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며 대꾸했다. 어디까지나 상황이 아쉬운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흥분은 불필요하다. 그가 나에게 내던진 불쾌함에 비례하여 솟아 올라오는 짜증을 겨우 삼켜 내리고 차분히 잠자리가 하나 모자라다는 말을 했다. 말을 모두 듣고 난 뒤 그 안내인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했던 그냥 좀 참으라는 말이었다. 침대 하나가 없으면 당장에 관절이 비틀어져 숨이 끊어질 만큼 급한 것도 아니었고 원인 제공도 하지 않은 짜증에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되기 싫었던 나는 할 수 없다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안내인 역시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아쉽게 서로 등을 돌리는 나와 안내인을 다시 마주보게 만든 것은 한 발짝 떨어져 불구경 하듯 쳐다보던 크리스였다. 그는 안내인에게 불편한 점 하나 없이 수도까지의 여정을 배려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안내인은 나보다는 성가신 상대인 레인저가 그렇게 치고 나오니 차라리 그 말을 들어주는 게 더 빠르겠다는 식으로 알았으니 따라오라며 급한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일이 해결되는 조짐을 보이자 크리스는 원래 방을 나섰던 목적을 취하기 위해 나와는 발걸음을 달리했다.
“참 재밌는 곳이지요?”
“네?”
“이 베니자크궁 말이에요. 참 재밌는 곳이지 않나요?”
“에에. 설명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급하게 계단을 오른 안내인은 그 도중에 등 뒤에서 급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내가 듣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대차게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뒤로 돌아설 것 같은 걸음을 그러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다 올라 그것을 중심으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의 왼쪽으로 날 끌고 가더니 그 자리에 세웠다. 그러면서 여기서 기다리라며 마찬가지로 걱정과 짜증이 섞인 미묘한 얼굴과 목소리로 내게 호소했다. 나는 그 기운에 눌려 아무 소리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고 그는 급하게 뛰어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저러다 넘어지지 않으려나 몰라.
“이 곳이 원래 쇼넬의 땅인 것은 알고 계시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엔트릴의 국토로 편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죠. 대충 들은 이야기로는 아직 이곳에 그 때의 주민들이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고 하던데.”
“네. 맞아요. 우리 쇼넬이 연합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가장 짧은 동선의 시작이 바로 이 곳 라임턴이랍니다.”
“네. 거기까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루하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곧 다시 오겠다던 안내인은 내가 등 뒤에 걸려있던 벽화를 3번이나 천천히 감상하는 시간이 흘러도 오질 않았다. 등 뒤에 걸린 벽화가 질려버린 나는 그 옆에 있는 그림으로 넘어가 다시 한 번 천천히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 마지막으로 하나 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모퉁이를 맞이하기 전 마지막으로 걸려있는 그림은 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작지만 힘이 가득 들어간 야무진 눈매에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이 얼굴에 붙어있기만 하다고 표현하고 싶은 입술. 얼핏 보면 무표정인 것 같기도 하면서 잔뜩 화가 난 얼굴이기도 했다.
“매년 쇼넬의 국빈을 맞이하는 땅이 바로 우리에게서 강탈해간 지명이라는 게 재밌지 않으신가요?”
“아아.”
“빼앗은 땅 위에 궁을 세우고 그 곳에서 그들의 왕족을 머물게 하는 이 상황이 재밌지 않으신가요”“아…….저어.역시 전 이만 나가보는 게.”
“아직도 이 땅엔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녀석 야무지게 생겼다 하며 지나쳐온 그림들 중 가장 긴 시간을 집중해서 쳐다보던 나는 그 아이의 얼굴 앞으로 다가가 표정을 따라 해보려 일부러 손가락으로 눈을 작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입을 가운데로 모아 일부러 바보 같은 표정을 만들기도 했다.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인 내 머리 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어. 그런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제가 아니라 다른 분과 하셔야 더 재밌으실 듯 한데…….”
“아. 미안해요. 내가 괜히 감상에 젖어서.”
“아…….아닙니다. 바람직한 말동무가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마치 그림 속 소녀와 같이 나를 내려 보던 그녀는 금세 내가 쇼넬의 사절단과 수도까지 함께 하는 일행임을 눈치 챘는지 금세 얼음과 같이 차가울 것 같은 표정을 풀고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어 근데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저어. 이번 사절단은 왕녀 전하께서 이끄신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네. 그리 하고 계시지요.”
“어떤 분이신가요?”
“네?”
“아, 저.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차피 수도까지 신세를 지게 될 큰 무리의 리더시잖아요.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두는 게 앞으로 행동하는데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아아. 전하는 그렇게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편하게 상대하실만한 분이시라…….”
나에게 증언을 약속한 엔트릴의 국민이 맞냐며 말문을 연 그녀는 맞다는 내 대답에 기쁘다는 듯 입 꼬리가 올라가는 큰 웃음을 얼굴에 품고는 다시 한 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냐며 물었다. 이 꼬마의 얼굴이 심금을 울릴 만큼 야무져서 어디 한 번 따라 해볼까 하여 눈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나는 급한 대로 안내인의 핑계를 댔다. 그가 나를 이곳에 세워두고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여태 돌아오고 있지 않으며 심심한 참에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노라고. 핑계는 그럭저럭 먹혀들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이 그 안내인을 불러주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가 잠시 대화나 나누자며 청해왔다. 결국 그 부탁을 수락했으니 이 자리에 앉아있기야 하겠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쇼넬의 사람들은 신분에 대한 큰 강박관념은 없는 듯 했다. 혹은 안전에 대한 무관심.
“흠.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받으니 난감하네요. 인격에 대한 평가는 언제 어디서 청을 받아도 어려운 법입니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네요. 생각하지 않으셔도…….”
“흐음. 제 멋대로인 성향이 좀 있다고 말이 많던데요?”
“쿨럭. 쿨럭. 크흡!”
멋모르고 앞에 놓여 있던 물을 삼키던 나는 거침없이 자신의 주군에 대한 평가를 내놓는 그녀의 목소리에 추잡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어머. 괜찮으세요?”
“예예. 전 괜찮…….쿨럭…….습니다.”
“질문을 하셔서 대답해 드린 것인데 그렇게 놀라시니까 당황스럽네요.”
“죄송합니다. 쿨럭. 그렇게 말씀하실지 전혀 생각을 몰라서…….”
“흐음. 지금 제 발언에 무슨 문제라도?”
“그게 아니라…….”
그렇게 가볍게 말하다가 누구 귀에 들어가서 와전에 과장을 거듭하여 왕녀 전화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끝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말이라는 건 정말 언제 어디에서든 조심해야 하는 게 인생사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을.
“혹시 전하께서 들으실까 겁이 나시는 건가요?”
“네? 아니 뭐 제가 겁 날건 없지만 그러니까…….그으…….”
“제 목이 날아갈까 걱정이라 그 말씀이시군요?”
웃으면서 자기 목이 날아갈까 걱정 해주는 거냐며 기뻐하는 듯 보이는 그녀는 나와는 사고 회로가 완전히 다르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감하게 해주었다. 아니. 딱히 나와만 다른 건 아닌 것 같다. 그녀의 밑에서 시중을 드는 분들은 꽤나 힘들겠구나 싶었다.
“종종. 전하를 앞에 모셔두고 직접 말할 때도 있답니다. 이보다 더 심한 말을 할 때도 많아요.”
“그건 좀 무섭군요.”
“하하. 그런가요. 워낙 편한 존재라서요. 그 분은.”
“들리는 말로는 전장에도 직접 지휘에 나서신다고…….”
“네. 맞아요.”
“말리지 않으세요?”“소용이 없는걸요. 아무리 말려도 전선에서 자신이 이탈하는 일은 용납을 못하시니까. 다들 포기해버렸지요.”
“굉장히 강하신가봐요.”
“신체적인 면에서야 그 험한 전장에서도 잘 돌아오시는걸 보니 그러신 것 같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을 흐렸다. 소중한 이를 걱정하는 마음에 생긴 근심과는 약간 달라 보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저 또 질문 잘못했다 하면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그냥 이 방에 안내인이 들를 때 까지 조용히 간단한 대답만 해야겠구나 하며 다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좀 늦네요. 내가 분명히 이곳으로 오라고 호출해두었는데.”
“괜찮습니다. 아까 보니 정말 많이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저야 뭐 당장 누워 자야하는 것도 아닌데 기다려도 됩니다.”
“그래도 귀중한 손님을 모셔두고 마냥 기다리게 하는 건 저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이보다 더 큰 배려를 베푸신다면 제가 더 부담스러워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별로 큰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답이나마 들을 수 있는 말동무가 아직도 필요하시다면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 네. 잘 알겠습니다.”
“아 참. 제일 중요한 것을 아직도…….”
“네?”
“저.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전 요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흐음.”
이름을 알려달라는 부탁에 그녀는 난감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나 큰 무례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여 왜 또 질문을 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드나 하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다행히 그녀가 난감한 것은 내 질문 때문이 아닌 다른 문제 같아 보였다. 적어도 날 죽일 듯이 노려보진 않았으니까.
“여기 계셨군요.”
조용해진 방의 공기를 깨운 것은 바로 파벨이었다. 당연히 그가 있어야 할 궁이고 만날 우연도 있기야 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우하다니 친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름 외엔 아는 것 하나 없는 사람인데 천군만마의 아군을 얻은 것 같이 든든하다.
“파벨경!”
“엇?! 요르씨. 당신이 여긴 어떻게…….”
파벨은 일전과는 다르게 날 심하게 경계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왜 그러시나 하며 아리송한 시선을 우연히 허리로 돌리자 슬며시 검을 뽑으려 손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심상치 않다. 결국 애먼 질문 하나 잘못 던져 나는 목숨을 잃게 생겼다.
“그 손 내리세요. 파벨경. 그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저…….전하!”
응? 뭐?
“내가 이 방에 함께 들어 말동무가 되어 달라 청했습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아 적잖이 즐거웠습니다.”
“에…….에…….에.”
“전하. 하지만 이런 행동은 지양하셔야 합니다. 위험하십니다. 요르씨가 그러실 거란 말은 아니지만 혹여나 살의를 품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미 일은 저질러졌겠지요? 그리고 그 책임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내 옆에서 이탈해 있던 파벨경의 책임입니다.”
제 멋대로다.
“저…….전하.”
“괜찮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나와 이 분은 서로에 지적 수준에 있어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나름대로 즐거운 대화를 나눴습니다. 다만 그 대화의 조건으로 내가 제시한 보상을 아직 이뤄드리지 못해 마음에 걸리는군요.”
붉게 저물어 가는 햇빛이 비춰 단풍과 같이 붉게 보이는 긴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확고한 의지를 담은 눈.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서서히 겹쳐 보이기 시작하는 벽에 걸려 있던 그 소녀의 얼굴…….
“인사가 늦었습니다. 나는 로즈 쇼넬. 이 베니자크궁에 머물고 있는 자랑스러운 쇼넬의 사절단을 이끄는 리더입니다.”
“와…….왕녀…….저…….저…….전.”
팔 다리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경련을 일으키는 것 마냥 미친 듯이 떨려오고 입 안에 침이 바싹바싹 말라간다. 파벨을 향하던 내 시선은 마치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보는 듯 불안정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감히 왕녀 전하 본인을 눈앞에 두고 이름 무어냐 물었고 성격이 어떻느냐 물은 셈이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겠다. 기절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지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 편이 더 편안하긴 할 것이라는 계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픽 하고 쓰러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내 두 손은 두 뺨을 부여잡고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준비를 마쳤다. 경박하게 좌우로 흔들리던 부실한 다리도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히이이이익!!!!!!!!!!!!!!!!!!!!”
-1장 末-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9-30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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