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前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現 삼성전자 상임고문)이 지은『초격차』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때마침 2018년 3분기 삼성전자가 사상 최대의 실적(매출 65조원, 영업이익 17.57조원)을 기록하면서 이 책은 더욱 화제가 되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마냥 시기를 잘 탄 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다른 경영서와는 차별화된 부분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이 글에선 그러한 포인트들을 소개드릴려고 합니다.
1. 간결, 핵심주의자
일의 핵심을 파악하면 본질은 매우 간단해진다는 것이 저자의 업무 철학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성격은 책의 문체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책은 쓸데없는 어려운 경영 용어나 부연설명이 최대한 절제된 느낌을 줍니다. 사례를 통한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 위주로 최대한 서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회장실 먼 곳에 있는 '회장님'이 썼다기 보다는, 사무실 바로 옆 자리 사람이 썼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책의 가독성이 매우 높으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도 잘 파악이 되는 편이지요.
다시 책의 내용으로 넘어가서 저자의 리더론을 요악하면, ‘권한 위임은 과감하지만, 책임은 모두 리더가 진다’ 입니다. 리더는 실무에 너무 많은 자원을 소비하지 않고 직원들에게 과감하게 위임한 채, 대신 더 큰 비전을 직원들에게 제시해야 하며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지식'이 아닌 '지혜'를 늘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승진한 임원들의 업무 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상당히 공감이 되었는데, 승진한 임원들이 새로운 부서에 부임하게 되면 대부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업무파악' 입니다. 해당 부서원들에게 업무 현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요청하며, 그래야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겠다는 취지겠지요. 그러나 보고는 말 그대로 업무 내용의 공유일 뿐, 이는 최대한 핵심만 파악할 수 있도록 간결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최적의 결론을 도출하는 '의사결정'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승진한 임원들은 의욕이 앞선 나머지 부서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업무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부서원들에게 많은 '보고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스스로 '월화수목금금금' 일을 하며 해당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하기도 하지요. 저자는 그렇게 해서 회사에 '이미 축적된 지식'을 직원에서 임원으로 '단순 이동'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는 반론을 합니다. 임원이라면 회사 내부의 지식보다는 직원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는 회사 밖의 정보와 통찰력을 기르는 데 더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 이 글은 링크되어 있는 브런치에도 함께 게시된 글입니다.
물론 임원이 어느정도 내부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보고' 자체가 주가 된 나머지, 직원들이 이미 내부적으로는 충분히 공유된 내용들을 임원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들고 정리하는데 몇 날 몇 주를 소비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종종 봐왔습니다. 심지어 내부적으로 임원에게 보고용으로 자료를 만드는 '보고 스킬'이 따로 있고, 귀중한 업무 시간에 이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회사생활을 하면서 업무 공유 수단인 보고의 역할은 그 중요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그 비중을 어느정도 설정해야 할지, 그 행위 자체가 각자 다른 역량에 힘써야 하는 리더, 직원들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2. 원칙주의자
저자는 회사의 모든 결정에는 원칙이 최우선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사실 회사를 경영하거나 부하 직원들을 통솔하는 리더의 입장에서 알고는 있어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원칙주의론 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원칙만큼 합리적인 것은 없다는 점에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원칙을 수립하는 것도 리더의 큰 덕목인 것 같습니다.
삼성종합기술원에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있었던 일을 사례로 듭니다. 종합기술원은 다른 관계사(삼성그룹 계열사)나 사업부의 선행 R&D 부서 보다도 더 전문적인 원천 기술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원천 기술을 중시했던 창업자의 정신이 깃든 곳이므로, 회사 내에서 그 누구도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하지요. 저자가 원장으로 취임하여 살펴보니 여러가지 폐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회사와 크게 상관없는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직원들이 고과 평가를 위해 논문 숫자에 매달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종합기술원의 연구 프로젝트의 세 가지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게 됩니다.
1)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고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연구는 얼마든지 지원한다
2)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기술은 지원한다. 외부회사에서 구매 가능하지만, 그것에 끌려다닐 경우 회사의 미래가 위협받을 수 있다.
3) 지금 존재하고 있고,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기존 기술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기존 제품이나 기술을 대체 가능하다면 지원한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종합기술원의 많은 프로젝트들을 정리하고, 연구원들을 현장 사업부서로 전환 배치를 시켰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네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소대장으로 배치도 받고 야전에서도 일하고 해서 장군이 되어야지, 왜 자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만 하려고 해?'
물론 직원들이 이 말을 들어도 '그야 교관이 저 한테 맞으니까요' 라고 불만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사의 이익'이라는 대원칙아래 잘 짜여진 소원칙들과 저런 찰떡같은 비유가 콤보를 이룬다면, 해당 직원의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불만은 있을지언정 충분히 납득되는 부분도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리더의 의사결정에 합리적인 원칙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충분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3. 뚝심과 끈기
출중한 능력에 적절한 승진까지 주구장창 성공가도만 달려왔을 것 같은 저자도 좌절의 순간은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승진한 후배를 상사로 모시며 8년 간 보고를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다가 갑자기 소규모 적자 사업부로 발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자도 당시엔 상당히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밝힙니다. 저자는 이 시기를 잘 포장하여 미화하지 않고 '인고의 세월'이라고 표현하지요. 그만큼 끈기를 가지고 참아가며, 뚝심으로 업무를 해나가며 버틴 것이지요.
물론 저는 말단사원이기 때문에, 저자의 사례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일들이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종종 위와 같은 상황을 마주한 적들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연차도 있기에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저연차 시절에는 멘탈 관리가 무척 힘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회사에서 나를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는구나 하는 생각부터 나의 커리어는 초반부터 꼬였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는 했지요. 회사생활의 의욕을 잃어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은 길고, 특히 인생은 더더욱 깁니다. 대부분의 순간들이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긴 인생을 바라봤을 때는 저자처럼 '그땐 그랬지' 정도로 회자 될만한 일인 경우들이지요. 그럴수록 기왕이면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어진 상황이 너무 좌절스러워서 회사생활을 도저히 긍정적으로 할 수 없다면, 그 기운을 회사 밖의 일로 표출하는 식으로 말이죠. 저자처럼 탁월한 경영자가 아니라 저 같은 보통사람의 입장에선 더욱 그러한 마음가짐이 중요하지요. 그 시절에 끈기를 가지고 잘 참아내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오히려 '지금이 다른 회사로 가는 기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이직을 했어도 그 때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저는 그 힘든 시기에 부정적인 기운에 빠져, '혼술'이 늘기도 했고 쉬는 날만 되면 별다른 의욕없이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지냈습니다. 부정적인 기운때문에 회사생활은 물론, 회사 밖의 삶조차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아무런 발전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끈기', '뚝심' 등의 단어는 요즘에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미련해 보이는 단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괴로워하며 월급날만 바라보게 되는 '수비적인 뚝심'이 아닌, 힘든시기를 적극적으로 타개하여 반등의 기회를 노리는 '공격적인 뚝심'은 경영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