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이라곤 고2때 일본으로 단체관광을 간 것 말고는 없는 내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곧, 제주도 여행을 뜻했다.
대략 2년에 한번쯤은 제주도를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작은 군대를 갔다 온 뒤 겨울방학이었다.
그땐, 친구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이틀을 잤다. 저녁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파티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장이었다. 일종의 마음 편한 동호회모임 같은 느낌이었다. 바비큐에 불을 피우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고기를 구웠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다.
친구와 나는 둘이었고, 우리는 술을 마시다 다른 곳에서 여행 온 여학생 둘을 알게 되었다. 꽤나 발랄하고 예쁘장한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다음날 우도를 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이미 우도를 다녀왔음으로, 신나게 우도의 정보를 떠들어댔다. 땅콩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전혀 맛있지 않더라. 길은 좁고 험해서 차를 끌고 다니기 쉽지가 않더라. 렌트를 했다면 우도 가는 여객선에 주차를 할 때, 그냥 도와달라고 해라. 여객선 주차요원은 주차를 매우 잘한다. 등등.
그런데 다음날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말을 떠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들은 우리의 정보를 듣고, 그날 같이 술을 마신 서울대생과 같이 우도로 떠났다. 차라리 모르는 척, 둘둘 짝지 우도를 한 번 더 갈 것을. 죽 써서 서울대생을 줘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모두 한 사람과 같이 여행을 떠났다.
바로 여자친구님 되시겠다. 여자친구가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남자 녀석들과 여행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관계로 그 뒤 모든 여행은 여친님과의 기억뿐이다.
그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번째 여행이었다.
3박4일간의 여행으로 기억하는데, 삼 일째 되던 날이었다. 전날 새벽, 비가 무척 많이 와서 우리는 여행계획을 수정해야하나 걱정이 많았다. 가기로 했던 목적지가 계곡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날 아침은 매우 맑았다.
제주도에 가본 날 중에 가장 날씨가 좋았던 듯싶다. 제주도는 항상 갈 때마다 구름이 많거나 비바람이 불거나 흐렸다. 그날은 햇볕이 쨍쨍하기 그지없어서, 새벽에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목적지는 안덕계곡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후문처럼 생긴, 중간의 애매한 곳에다 차를 세워두고 계곡 아래로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계곡은 말 그대로 곡谷이어서, 양 옆으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무협지에서나 상상하던 그런 계곡이었다. 주인공이 경공으로 건너야 하는, 또 그러다 떨어지면 기연을 얻을만한, 그런 곳이었다.
전날 비가 온 탓인지 물이 탁했다. 다행이 물이 불지는 않아서 계곡 아래를 둘러볼 수 있었다. 계곡 아래서 물길을 따라 상류로 조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숲길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오는데 우리의 첫 목표가 그곳이었다.
계곡 아래에서 사진도 찍으면서 신발이 물에 젖지 않게 조심하며 앞으로 걸었다. 길이 먼 것은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천천히 걸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앞사람들의 발자욱을 따라서 물웅덩이를 뛰어넘고, 마른 돌을 밟으며 앞으로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멀리 계단이 보였다. 다만, 계단 앞에 물 웅덩이가 깊게 고여 있어서 사람들이 진행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뭔가 기분이 쎄함을 느낀 것은.
멀리서 세 팀 정도 계단 입구를 통과하는 걸 보았는데, 갈수록 웅덩이의 크기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지나갔던 사람들은 가벼운 점프로 지나쳤지만 마지막 커플은 도저히 신발을 풍덩 담그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밟아왔던 마른 땅의 넓이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아직 앞에는 사람들이 있고 뒤를 따라온 사람들은 없었다. 징조가 좋지 못했다.
나는 수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계곡물이 불어나는 것이다. 위급함을 느낀 나는 여친님의 손을 잡고, 뒤를 향해 걸었다.
여친님은 영문을 모른 채 내 손에 끌려 이동했다. 왜 다시 돌아가냐는 질문에 길게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아마도 확신에 차 여친님의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고 행했던 내생의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그 때의 내 패기 덕분에 여친님은 우물쭈물하면서도 나를 잘 따라 주었다.
나는 물 웅덩이에 발이 담겨 젖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여친님은 물에 젖은 내 신발을 보며 걱정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물이 차오르는 게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는 걸.
어찌저찌 우리는 계곡 아래에서 올라와 주차장까지 이어지는 포장된 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전이 확보 된 뒤에야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여친님께서 물어왔다.
“왜 그렇게 급해, 신발 다 젖었잖아.”
나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벌써 계곡 아래엔 흙탕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우리가 있던 계곡 아래 공간은 집채도 쓸려 내려갈 물길이 되어 콸콸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 오는 날 계곡이 무섭다는 건 뉴스로나 접했지 실제로 겪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두 번 겪을 자신도 없었다.
그 다음의 제주도 여행은 사실 제대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 제주도를 여행하는 설렘과, 신나는(?) 모험이 있었던 앞의 두 여행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리라. 게다가 그 다음부터 갔던 여행들은 이미 익숙한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상업적으로 잘 개발된 리조트만을 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많이 보고 많이 겪는 경험이라는 것이 어떤 때는 도움이 되지만 어쩔 때는 설렘을 방해하기도 한다. 특히나 제주도는 미디어를 통해서도 너무 많이 접해버렸다. 최근의 제주도 여행은 효리네 민박에 나왔던 곳을 가고 블로그에 소개된 펜션에서 묵었다. 그런 곳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된 모험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 스스로 목숨을 구원한 여친님과의 여행은 최고의 여행이기도 했다. 평소에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빌어먹을 코로나가 끝난다면 새로운 모험을 찾아 해외로 한 번 나가보고 싶다. 물론 전과 같은 위험을 또 겪는 건 사양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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