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퇴근 기념으로 좀 길게 써서 올려 봅니다.
11. 다사다난한 생활의 연속 “정말 K PM님 때문에 날 뽑은 거냐”
라고, 회식이 끝나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기획팀장에게 물었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놉’이었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K가 원래 좀 그런 성격이라고. (둘은 친구같이 (사내에선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지내는 사이였다.) 그러려니 하라고 말하는데.
그 말투나 분위기, 표정이 뭔가…다 내려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괜히 싸한데, 뭐 물어볼 만한 구실은 없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기획팀장은 자리를 빼고 모두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회사를 떠났다.
‘K의 작품’이다, 가 학계, 아니 사내의 정설이었다.
대체 왜? 표면적으로나마 둘은 친구사이였고, 공생이 필요한 관계인데?
술자리에서 정말 그런 의문들이 무지무지 쏟아졌지만 지나고보니 답은 뻔했다.
K는 기획팀장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PM은? PM도 권한이 강려크한 직책이지. 하지만 게임 실무에 관여할 여지가 적다. (당시의 개발PM과 지금의 전형적인 PM조직은 다른 세상이다. 오해 없으시길 바람)
그리고 이미 본인이 개발 외의 파워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또 확장할 수 있으니, 회사의 차기작인 이 프로젝트의 실무 권한까지 쥐게 된다면 더욱 막강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테지.
그럼 이 K가 실무 능력은 있느냐?
아니옹.
물론 기획자 일을 해 봤다고 하니(그걸 믿는다면) 기본적인 업무 능력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았다.
더불어 팀장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게는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게임 기획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질텐데, 그걸 바탕으로 조율하고 협업하도록 기획을 짜고 컨펌을 내리고 실무 적용하도록 관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욕심을 과하게 부린 것이었다.
그리고 기획팀은, 그 정치질이 부른 유탄을 제대로 맞게 되었다.
우선 잘린 기획팀장은 나름 기획팀을 ‘정치질’로부터 보호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탱커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극딜을 팀원들이 모조리 받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대가리가 사라졌으니, 다른 팀에서부터 시작되는 공격 역시 대폭발되었다.
모두가 어질어질해져만 가는 시기에, K는 기획팀원에게 괜히 친한 척 접근하며 어필하고 다녔었다. 자신이 보호해 주겠노라는 그런 분위기를 마구마구 풍기며.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K가 기획팀장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선 PD이자 개발본부장인 J가 그렇게까지 ‘뇌순남’은 아니었다. 지금도 간간이 개기기도 하고 딴짓도 하는 인물에게 날개까지 달아주는 짓을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 역시, K가 기획팀장을 할 정도로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기획팀 내부 분위기 역시 파악을 했을 것이다. 당시 팀장이 나가고 모두 멘붕 상태가 됐지만, 빠르게 정신들을 차리며 수습을 하려고 모두가 노력했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시스템 파트장 c를 팀장으로 올려야 한다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을 모았었다. 그런 분위기와 목소리가 안 들렸을 리가 없다.
전 팀장은 나름 능력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J의 꼬장과 K의 횡포, 다른 팀장들의 공격과 정치질을 견디며 어떻게든 기획팀을 굴리고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J가 사내 정치질에 밀려 이상한 소리를 해서 방향성을 바꾸더라도 그걸 어떻게든 되게 하거나 방어하거나 했던 인물이기도 했었다. 빨리 프로젝트를 출시해야 J가 명분을 얻어 사내 패권을 차지할 것이다. 안 그래도 최소한 다른 프로젝트로 갈 것이다. 그게 현재 우리 팀이 사는 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런 팀장 밑에서 c는 충실하게 게임 밑바탕 기획을 담당했었다. 서울대 아랫급의 명문 대학 출신이었는데, 시스템 기획자답게 이성적이고 차분했으며 똑똑했다..나와 동갑이었기에 친구를 먹었었는데, 어색한 친구 같은 관계였지만 나름 잘 지냈었다. 내 입장에서도 이 친구가 기획팀장을 맡아야 게임에 미래가 생긴다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유선은, 아니 J는 그나마 팀장이 나가리되는 건 내버려 두긴 했어도, 그 후계까지 망치지는 않았다.
c를 팀장으로 세우며 기획팀 개편을 단행한 것이다. 시스템 파트장과 새롭게 컨텐츠 파트장을 세워 c를 보좌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 컨텐츠 파트장은 내가 맡게 됐다.
아니, 맡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인원이 둘 뿐이었으니까. 크크크
a와 나 뿐이었다. 그리고 a는 절대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K를 비롯해서 협업을 하는 쪽 리더들의 의견)
결국 나 밖에 더 있겠는가?
그리고 당연하게도, 내가 파트장이 된 이후부터 K는 나를 볼 때마다 입을 털었었다.
자신이 나를 파트장 만들어 준 거라고, 그 때 말하지 않았었냐고.
그런데 그런 자신을 배신 때린 거라고, 염불이가. (뒤에 쓰레기라고 욕도 했겠지.)
크크크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으나, 나름 잘 웃어 넘기며 때론 씹고 때론 장단 맞춰주며 버텼던 기억이 난다.
뭐, K가 그렇게 하고 다닐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K PM 시말서라도 써야하는 거 아냐?”
우연히 여직원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었을 때는, 또 뭔 일이 있나 싶었지만 그냥 넘겼다.
원래 K는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본업이요 취미였는지라, 자잘한 실수로 인해 여기저기서 원성이 나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소리들이 유독 여직원들 사이에서만 도는 것 같은 게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a가 엮여 있었다.
돌이켜보면 a는 여직원들 사이에서 나름 신망과 인기가 있었다. 여직원들은 주로 아트쪽에 포진되어 있었고, a의 업무 특성상 그 쪽과 소통을 할 일이 많았기에 당연하긴 했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말투와 성격, 약간 보이쉬해 보이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아트쪽 팀장 파트장들 중 정치꾼들이 좀 많았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직책자들이 (파트가 많다보니) 많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PD인 J가 아트 출신이었고 전 프로젝트에서 대거 데리고 넘어온 측근들이 아트 직책자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내 기억으론 아트 쪽 직책자와 작업자간의 이반이 굉장히 심했었다.
하나의 예로,
“애니 리스트 안 넘겨 주셔서 일을 못하고 있어요, 염불 파트장님”
“네? 애니 파트장님한테 공유해 드렸는데요?”
“눼? 오전에 물어 봤을 때는 없다고 하셨는데…”
애니 작업자가 와서 물어보길래 대답했더니 돌아온 반응.
불X, 아니 무릎을 탁 쳤다.
이거슨 1타2피, 한 번의 칼 질로 두 명의 상대를 동시에 맥이는 법 아니겠는가?
자신이 싫어하는 파트 내 작업자와 기획을 단번에 뙇~
a는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쪽 파트장에게 항의하고 팀장을 찾아가고 했었다.
나? 나도 그런 성격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a가 그렇게 하는데 나까지 나서서 난리를 친다?
같이 죽자는 거고, 더 큰 문제는 일이 안 굴러간다.
이거슨 몇 번 같이 싸웠다가 된통 당한 뒤에 얻은 교훈이다. (정확히는, 아트 리소스가 머지가 안 되어 곤혹을 치르고 PD부터 팀장한테까지 깨진 뒤에, 팀장이 내게 조언을 해주어 고치게 된 스탠스이긴 하다.)
‘당신, 연차는 낮지만 나이가 있는데…그러라고 뽑은 줄 아느냐?’
이런 얘기는 지금도 (연차는 낮지만 > 연차도 높은데, 로만 바뀌어서) 이직하고 간간히 듣긴 한다. 크크크
아무튼 a가 저러면 뒷수습은 내 몫이었다. 우선 a가 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했으면 가서 진정시키고 a를 돌려보낸 뒤 해당 직책자와 이야기를 나눠서 푸는 것.
a에 대한 어그로는 쌓이고 쌓여서 이미 높은 상황이었는데, 당연히도 그 어그로는 해당 팀과 파트의 직책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K한테 공유되었던 것이다.
약간 다른 쪽으로 샜는데, 아무튼 K에 대한 이야기는 a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K는 사내 여직원들에게 들이대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한 여직원에게 꽂혀서 편지까지 썼지만 대차게 까였다는 것.
문제는 까이자 치졸하게도 어떻게든 못 살게 굴려고 난리 난리를 쳤고, 그런 행동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 원성이 이어지고 공론화까지 된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스토커 수준으로까지 행동을 했다던데, 확인되진 않았었다. 그때는 ‘스토킹’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지 않았었고, 그런 행동에 대해 혀만 쯧쯧 차고 넘어가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런 일련의 흐름에 중심으로 있던 게 바로 a. 앞서 K의 여직원들에 대한 기행(?)이 있을 때도 a는 그걸 다 알고 있었고, K를 알게 모르게 쪽 주고 있었던 것 같다.
K가 왜 그토록 a를 싫어하고 내쫓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알 수 있었던 대목.
물론 이 정도(?) 일 가지고 나름 권력을 가지고 있던 K가 몰락했을 리는 없다.
지탄을 받고 좀 자중모드로 가기만 했을 뿐.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는 태도로 사무실에서 조용히 지내기에 아주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곧 도로마무 되어 ‘참 한결같은 사람이네’ 했던 기억이 있으니까. 크크
하지만 K가 가진 권력을 놓게 되는 시점은, 본인조차 어처구니 없게도 빨리 그리고 확 치고 들어오게 된다.
그 서막은 바로 엘리베이터에서 시작됐다.
어느 날 아침.
출근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사람들이 빡빡하기 마련.
우리 회사는 원래 탄력 근무제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공통적으로 느즈막하게 출근하는 시간대가 제일 사람들이 많기 마련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밀려드는 엘리베이터 끄트머리에 K가 막차 두 번째로 탑승했고, 그 뒤로 닫히는 문 을 비집고 여직원 한 명이 세이프.
“아, 아침마다 힘들어서 정말.”
“그러게요. K PM님.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맛있는 거? 회식 때 많이 먹어요.”
“회식비 쥐꼬리만큼 나와서 뭐 먹을 수가 없어요.”
“거기 팀장들 있잖아. 팀장 파트장들 한테 한 턱 쏘라고 하던가.”
“에이…다 유부남이어서 무슨 돈이 있다고. PM님이 회장님한테 건의해서 회식비 좀 올려달라고 하시면 안 되요?”
“뭐? 하아, 노인네가 그렇게 해 주겠어요? 우리 이렇게 굶고 사는 게 다 그 양반 때문인데. 얼마나…으휴”
그 말에 여직원이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뭐 어떻게 했길래 그래, K야?”
“!!!!!!!!!!!!!!!!!!!!”
예상하신대로
엘리베이터 뒤에
우리의 황제 폐하
C회장님께서
사람들 속에 파묻혀 계셨던 것이다.
C회장님이 키가 작으시기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C회장님의 한 마디에
그 좁던 엘리베이터가 홍해 바다 갈라지듯이 갈라졌고
그 순간 열린 문으로 내리는 놀란 표정의 사람들 뒤로
사색이 된 K와
벌개진 얼굴의 회장님이 마지막으로 내리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앗 회장님, 그게 아니라 그…자꾸 회식비 가지고 그러니까 지금도 충분한데….농담이죠, 농담. 냐하하”
“어, 그래? 그렇지? 음, 그래. 알았어. 수고해라!”
회장님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K. 하지만 회장님은 눈길도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보안문 안으로 들어가셨다.
직접 보진 못하고 전해 들은 이야기이고, 여러 가지 버전(?)과 MSG친 내용이 있지만
어쨌든 저런 식의 흐름과 내용, 사건은 동일하다. 크크
그리고 이 사건을 직접 보든 전해 들었던,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예상했다.
K는 망했다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예상이었다.
맞는 건 K는 망했고
틀린 건 K는 예상보다 훨씬 심하게 망했다는 것.
사실 K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말은 모두 팩트긴 했다.
우리 회장님은 정말 알뜰살뜰한 분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사업부가 모처럼 업데이트한 캐쉬 템이 성과를 내어
사업부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그 장소는 건물 1층인가 2층에 있던 중국집.
당시 저녁 식대로 먹을 수 있던 곳이다.
뭐, 그래도 다른 요리라도 먹을 수 있겠지, 하고 간 직원들을 향해
C회장님은 스킬을 시전하셨다고 한다.
“어어, 많이들 먹어. 난 짜장면!”
…
당연히 메뉴는 짜장면 혹은 짬뽕으로 통일.
뭐 이런 식이다. 이런 분이 회식비를 올려 줄 리가 만무하지.
어찌 되었든 엘리베이터 안의 사건은 삽시간에 회사에 퍼져 나갔고
생각보다 그 반응은 빨리 왔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열린, 매주 진행되는 직책자들의 회의.
팀장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회의가 시작됐는데.
PM자리, 즉 PD 옆에 앉아 있어야 할 K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그리고 PD가 서두에 입을 열어 밝힌 K의 직책 변경.
그것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