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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4/04/07 00:20:14
Name Bar Sur
Subject [편지] PgR21의 누군가에게(5)
  안녕하십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학교 도서관입니다.(물론 글을 올리는 시점은 한참 뒤가 되겠죠.) 제게 있어서 학교 도서관은 이래저래 글이 잘 안 써지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습니다. 머리 속에 생각이 나는 부분은 일단은 그 장소에서 바로 써야 안심이 되기 때문에. 그 점 감안하시고 군데군데에서 글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질 때는 요가나 북치기박치기를 한 번씩 해주시면서 잠시 일탈을 통해 당신 마음 깊은 곳의 측은지심을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딱히 주제를 정해 놓았던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의문이 생겨나 오늘은 그 의문점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우리 학교 도서관의 이른바 '후줄근 문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후줄근 문고'가 무엇이냐 하면,(이 이름은 제멋대로 붙인 것이므로 혹여 원래 이름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책 내부는 멀쩡한데 비해서 그 겉표지가 후줄근한 단색의 종이판으로 되어 있는, 학교 도서관 5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입니다. 보통의 문고판이라 할 수 있으면 그럴 수 있으되, 어쩐지 보고있으면 한숨이 푸욱 튀어나오고 마는...... 그런 겉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처음에 이런 표지의 책들을 몇 권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들이 출판본을 복사한 것에 후줄근한 겉표지만을 붙여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합법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냥 그렇게 납득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었습니다.


  '후줄근 문고'는 놀라우리만치 출판본과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재미있는 건, 출판본만의 특수한 재질의 페이지라든가, 칼라 페이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원본의 겉표지만을 떼어내고 지금의 후줄근한 특수 표지만을 가져다 붙인 것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불합리합니다. 첫째로 그 후줄근하고 어두침침한 남색 표지 때문에 2m만 책에서 떨어져도 금박을 붙여 놓은 책 제목이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이며, 단순히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도 그 후줄근한 단색 표지는 책에 대한 흥미와 독서 의욕을 감퇴시킬 것도 분명합니다. 애초에 원래의 표지만을 떼어버릴 필요성이 없질 않습니까.


  그런데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몇 개의 페이지에서는 어설프게 복사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비록 몇 권의 책에서만 보았을 뿐이지만). 예를 들어 문고판에서 분명 회색 바탕이었던 페이지가 복사가 잘못되었을 때처럼 색이 바래있고 그 위로는 활자로 뭉개진 것이 보이는 것이죠. 그렇다면 역시 이것은 그저 잘 만든 복사본인 것일까? 섵부른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른 부분은 완벽하게 출판본과 동일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자. 여기에서부터 나는 진지하게 가설을 세워보기로 한 겁니다.

  1. '후줄근 문고'는 복사본과 원본이 부분부분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2. 어째서인지 우리 학교는 그 '후줄근 문고'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3. 가장 놀라운 점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후줄근 문고'는 계속 늘어날 듯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여기까지의 가정을 떠올리고나서 "캥거루 씨"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어제 꿈에 나온 캥거루 씨들을 말입니다.

  1972년 이후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자녀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해 가슴의 아기 주머니를 막아버린 캥거루 씨들은 지금은 OK목장에서 10여km 정도 떨어진 황야의 공장에서 버려진 책들을 보아 온전한 책으로 다시 탄생시키는 시스템을 범(汎)캥거루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에 맞추어 살아남아야 하며, 그들은 수요 이상으로 공급되는 책들의 잔해를 모아 새롭게 정돈하고 그 양을 늘리는 그들 자신의 작업 자체에 무척이나 보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캥거루 씨에게 물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데 어려운 일은 없나요?"

  "굳이 어려운 일은 없지만, 사람들이 버린 책들은 표지가 엉망이라 다시 사용할 수가 없어서 가끔씩 외부의 청탁이 들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의 특수한 표지를 사용하고 있죠."

  여기에서 다시 가정을 추가합시다.

  4. 캥거루 씨들은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버려진 책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한다.

  5. 캥거루 씨들은 그 버려진 책들을 통해 다시금 온전한 책을 만들어 내는 공장에서 일한다.

  6. 캥거루 씨들의 공장은 종종 외부의 청탁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무척이나 저가로 원본 숫자를 늘일 수 있다.

  7. 그러다보면 표지만이 부족한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아하, 이제 모든 일련의 가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겠군요.

  즉, 학교에서는 캥거루 씨들의 공장에 책을 보내어 일련의 작업을 거쳐 캥거루 씨들이 모은 책의 중요 부분들과 원래의 책의 잡다한 복사본을 맞추어 출판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원본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캥거루 씨들로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문고 늘이기'를 완성할 수 있고 그들 공장의 수요와 공급을 맞출 수 있어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저가로 부족함없는 복사본 아닌 복사본을 만들어내는 학교 측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캥거루 씨들이 조달할 수 있는 표지가 모자라 후줄근한 표지를 붙여야 하기는 하지만, 뭐 어때? 아무도 불만을 말하지 않는걸?


  이야. 대단한 시스템인걸. 아주 좋아! 인정! 새삼 흐믓해져 도서관에서 껄껄 웃고 말았습니다.


  캥거루 씨들의 공장에 언젠가 찾아가봐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작업을 보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 될 것 같군요. 당신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ps.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위의 이야기 중에 캥거루 부분부터는 순전히 혼자 놀기의 망상입니다. 심심해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인 것이죠. 죄송합니다. 다음 편지는 제발 제대로 된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왜 니가 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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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J
04/04/07 00:29
수정 아이콘
여기서 내려가면 4차원의 세계가 나타날지도 몰라...
그래서 보도블록 아래로 내려가기를 주저하던 제 큰언니님이 생각나는군요.
다행스럽게도(?) 아직 저와 같은 3차원세계에 살고계십니다.
(저도 비슷한 증상이 있다고는 말 못합니다.)
캥거루씨들의 공장의 위치가 궁금하시다면 학교 도서관측에 문의해보시면 될겁니다.^_^
(그곳에서도 모른다면 학교재단 총무과에 가보시면 될겁니다.)

으음..오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어야 겠군요.^^
오늘은 유독 즐거운 편지 잘 읽었습니다.
04/04/07 01:35
수정 아이콘
음.. 저도 책이 읽고 싶어 지는 군요... 아니면... 엘리스와 같이 이상한 나라에나...
총알이 모자라.
04/04/07 09:31
수정 아이콘
도서관에서는 직접 책을 구매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일괄 구매하여 각 도서관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저가로 판매하는 거죠. 이럴 경우 출판사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겉표지를 서점 판매용과는 다르게 단순하게 만듭니다. 어차피 도서관에서는 목록으로 책을 찾으니까요.^^
마술사
04/04/07 10:41
수정 아이콘
상당히...글 분위기가 무라카미 하루키틱 한거 같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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